김성일 (15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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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성일은(1538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황의 제자이다.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590년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귀국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상반된 보고로 논란이 일었으며, 임진왜란 발발 후 경상우병사로 있다가 체포되었으나,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의병 모집에 기여했다. 이후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했으나, 1593년 진주에서 병사했다. 사후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문충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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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153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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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김성일 |
한자 이름 | 金誠一 |
로마자 표기 | Gim Seongil |
출생 | 1538년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안동 |
사망 | 1593년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
본관 | 의성 |
시호 | 문충(文忠) |
직함 | |
직책 | 조선의 형조참의 |
재위 기간 | 알 수 없음 |
영의정 | 류성룡 |
임금 | 조선 선조 |
최종 계급 | 경상우도순찰사 |
학문 | |
분야 | 성리학 |
스승 | 이황 |
주요 저작 | 《상례고증》, 《해사록》, 《학봉집》 |
호 | 학봉(鶴峰) |
자 | 사순(士純) |
가족 | |
아버지 | 김진 |
어머니 | 여흥 민씨 |
형제자매 | 김복일 |
군사 경력 | |
참전 | 임진왜란 |
서훈 | 이조판서 추증 |
2. 생애
1538년(중종 33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이황의 제자였으며, 1568년(선조 원년) 3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 장령, 부제학 등을 지냈다.[2]
1590년(선조 23년)에는 조선통신사의 부사(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 후 정사(正使)였던 서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당시 조정 내 붕당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김성일의 보고가 받아들여졌다.[2]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였다. 전쟁 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보고했던 책임으로 체포되었으나, 한성으로 압송되던 중 직산에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의병 모집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고 가희대부(嘉喜大夫)의 품계가 더해졌다.[2]
1593년(선조 26년) 4월, 진주에서 5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2]
사후 대제학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노강(盧江)의 퇴계묘(退溪廟)에 배향되었다.[2]
2. 1. 어린 시절
아버지 김진(金璡)과 어머니 민세경(閔世卿)의 딸 여흥 민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안동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김만근(金萬謹) 대에 안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했으며, 할아버지 김예범(金禮範)은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고 사후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으로 증직되었다. 아버지 김진 역시 1592년 김성일이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면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1562년에는 승려 보우(普雨)의 건의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을 옮기려 하자, 그는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156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7년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2. 2.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568년(선조 1년) 31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 장령, 부제학 등을 지냈다.[2] 이후 정자, 대교, 봉교 등의 관직을 거쳤다.1572년(선조 5년)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의 복권과 종친 등용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에는 전적과 수찬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과 같은 요직을 맡았다. 1577년에는 종계변무를 요청하는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사행 길에 요동의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의 목적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1579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시정을 과감하게 비판하고 왕실 종친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 여러 고을을 순행하며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 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에는 특별히 나주목사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의 민폐를 해결하는 데 힘썼다. 당시 순무어사로 파견된 김여물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늦게 관아로 돌아오자, 김성일은 이를 꾸짖고 관아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1590년(선조 23년)에는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 후 보고에서 정사였던 서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당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던 상황에서 김성일의 보고가 받아들여졌다.
1591년(선조 24년)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경상우병사로 재직 중이었다. 전쟁 전에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던 책임으로 체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되던 중, 직산에서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초유사로서 의병 모집에 큰 공을 세웠고, 이 공로로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고 가희대부(嘉喜大夫)의 품계가 더해졌다. 1593년(선조 26년) 4월, 진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 3. 조선 통신사 부사
1588년,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사절로 보내 명나라 침략 의사와 조선을 통과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선조에게 전달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외교 관계 수립을 통해 일본을 조공 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하였고,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있던 김성일은 히데요시가 보낸 겐소(玄蘇), 소 요시토시 등과 통호 문제를 논의하였다.같은 해 11월 18일,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김성일은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당시 정사(正使)는 서인인 황윤길(黃允吉)이었고, 서장관(書狀官)은 허성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 한양을 출발하여 8월 교토에 도착했다.[4]
교토에서 통신사 일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는 과정에서 간파쿠(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두고 정사 황윤길과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김성일은 히데요시가 일본 국왕이 아니므로 국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3월, 통신사 일행은 귀국하여 일본의 정세에 대해 서로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5]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강력히 제기한 반면, 부사 김성일은 침략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하여 논란이 일었다. (자세한 내용은 #상반된 보고와 논란 참조)
2. 3. 1. 상반된 보고와 논란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 재직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 문제를 논의하였다. 같은 해 11월 18일,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 한양을 출발하여 8월 교토에 도착했다.[4]당시 정사(正使)는 서인인 황윤길(黃允吉), 서장관(書狀官)은 허성이었다. 교토 도착 후, 통신사 일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성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이유로 12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히데요시와의 접견 과정에서 간파쿠(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두고 정사 황윤길과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김성일은 히데요시가 일본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히데요시는 조선 사절단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공 사절단으로 여기고, 선조가 일본에 "항복"했으며 명나라 침략에 조선군을 동원하라는 내용의 오만한 서신을 전달하려 했다. 사절단은 이에 항의했고, 히데요시는 "일본 조정에 항복한다"는 문구는 삭제했지만 나머지 내용은 바꾸지 않았다.
1591년 3월 (음력 2월 부산 도착),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들의 보고는 극명하게 엇갈렸다.[5]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왜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며 히데요시를 '눈빛이 반짝이며 담력과 지략이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반면, 부사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러한 정상(침략 징후)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또한 히데요시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이처럼 상반된 보고에 대해 당시 영의정이자 같은 동인이었던 류성룡은 김성일의 손을 들어주었고, 선조 역시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했다. 그러나 류성룡은 내심 불안하여 어전 보고 후 김성일에게 개인적으로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兵禍)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성일은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류성룡은 자신의 회고록인 징비록에 기록했다.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기록이다.)
김성일의 보고 이후, 서인인 황윤길과 조헌 등은 계속해서 왜의 침입 가능성을 주장했지만,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동인 세력은 "서인(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매도하며 이들의 주장을 배척하였다.[6] 조선왕조실록은 이러한 상황을 기록하며 당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황윤길의 보고 이후 조정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성을 쌓고 군사를 정비하려 하자 백성들의 동요가 일어났다. 이에 김성일은 다시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며 민심 안정과 내치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즉,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이 진정한 방비책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성일의 판단은 큰 비판에 직면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음력 6월 28일 기록에서 김성일의 보고를 비꼬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김성일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가 막 돌아와서,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인가. 동시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黃允吉) · 허성(許筬) 같은 사람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다."[7]
후일 안방준(安邦俊) 등은 김성일을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 중 하나로 지목했으며, 그는 왜란 초기에 파직되었다.
한편, 일본에서의 통신사 활동 당시 히데요시를 만나기 위해 몇 달을 기다리는 동안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때, 김성일만이 적극적으로 만남을 독촉하고 히데요시의 오만한 답서에 대해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도 통신사가 묵었던 곳에는 부사 김성일을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2. 3. 2. 성리학적 인물관
김성일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평가함에 있어 성리학적 관점을 적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히데요시에게서 성리학적 학식과 예를 찾으려 했으나, 히데요시를 간파쿠(關伯)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은 성리학적 소양이 아닌 무력과 천하를 제패하려는 야심이었다.[8] 김성일이 히데요시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라고 답한 것 역시, 외양이나 예법 등 성리학적 기준에 기반하여 인물을 판단하려 했던 시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리학적 인물관은 결과적으로 히데요시가 가진 현실적인 위협과 침략 의도를 간과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2. 4. 임진왜란과 죽음
1590년(선조 23년) 조선통신사의 부사(副使)로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정사(正使)인 서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부사였던 동인 김성일은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상반된 보고를 올렸다. 당시 조정 내 붕당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보고가 받아들여졌다.[2]1591년, 조선 조정이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점차 파악하게 되자, 김성일은 경상도 방어를 책임지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군사 경험이 부족했으며, 이때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을 반대하기도 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쟁 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보고했던 김성일의 책임론이 불거졌다. 그는 선조에게 허위 보고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나, 좌의정 류성룡의 변호로 석방되어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초유사로서 의병 모집과 전란 수습에 힘썼으며, 이 공으로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고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다.[2]
1593년(선조 26년) 4월, 진주성에서 역병으로 인해 56세(만 5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2] 임진왜란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1598년까지 계속되었다. 사후 대제학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2]
2. 4. 1. 경상도 초유사 활동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에 의해 경상도 일대가 심각하게 유린되자, 김성일은 사태 수습을 위해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정통을 이은 수제자로 평가받았으며, 왕실 권력이나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백성을 위해 직언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류성룡 등은 그가 흩어진 경상도 민심을 수습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선조에게 추천했다.앞서 1591년, 조선 조정이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파악하기 시작했을 때, 김성일은 경상도 지역 방어를 책임지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으나 군사 경험은 부족했다. 그는 당시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에 반대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빠르게 북진하자, 조선 조정은 이전에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보았던 김성일의 판단을 문제 삼았다. 그는 왕에게 허위 보고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사형 위기에 처했으나, 류성룡의 적극적인 변호로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 후 초유사로 임명된 김성일은 즉시 경상도로 내려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격문을 지어 흩어진 백성을 모으고, 전쟁으로 무너진 군율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관군이 사실상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정식 의병장으로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용맹한 인물들을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맡게 하였으며, 여러 지역을 직접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배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의병장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겨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때, 김성일이 나서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성일은 초유사로서 혼란 수습과 의병 활동 지원에 힘쓰던 중 1593년 역병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2. 4. 2. 진주성 전투와 최후
김성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초유사로서 피폐해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은 당시 진주판관이었는데, 진주 목사가 병사하자 김성일의 명으로 목사직을 대리하여 진주성을 지키게 되었다. 김시민은 호남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왜군이 진주성을 통해 호남으로 진격할 것을 예측하여 성의 방비를 강화하고 관군과 의병을 통합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김성일은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중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나라의 운명과 붕당 정치의 폐단으로 왜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책임이 있었음을 깊이 후회했다고 전해진다.2. 5. 사후
1604년 (선조 34년) 선무원종1등공신에 추서되었다. 이에 따라 1592년 이조참판 겸 동지에 추증되었던 아버지 김진(金璡)은 다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의금부지사에 가증되었다.1606년 (선조 38년)에는 그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이 추증되었다. 1607년 (선조 39년)에는 임하현에 그를 모신 임천향사(臨川鄕祠)가 세워졌다. 임천향사는 1618년 (광해군 10년) 사액을 받아 임천서원(臨川書院)으로 승격되었으며, 그를 모신 사당은 존현사(尊賢祠)라는 현판을 받았다.
1619년 (광해군 11년) 묘비석이 세워졌으며, 비문은 한강 정구가 지었다. 1664년 (현종 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비문은 우복 정경세가 지었다.
1676년 (숙종 2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으로 가증되었고, 1679년 (숙종 5년) 문충(文忠)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사후 노강(盧江)의 퇴계묘(退溪廟)에 배향되었다.
3. 평가
김성일에 대한 평가는 주로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서의 활동과 관련하여 엇갈린다. 서인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귀국 후 보고에서 황윤길과 달리 히데요시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이 전쟁 대비에 소홀하게 되었다는 비판이 있으며, 특히 황윤길의 후손인 사학자 황의돈 등은 김성일에게 전쟁 발발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 등으로 임명되어 의병 모집과 군량미 확보 등에 힘쓰며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였고, 전란 중에 병사하였다. 그의 보고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한 신중한 판단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신복룡은 김성일이 '문중 사학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평가하며, 그의 진심과 마지막 행적을 통해 충절과 애국심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이처럼 김성일에 대한 평가는 그의 통신사 활동 보고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3. 1. 부정적 평가
2000년대에 들어 김성일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현대 한국사학계 일부에서는 교과서 편찬 과정 등에서 김성일을 임진왜란 발발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을 처음 제기한 학자는 황윤길의 후손인 사학자 황의돈이었다.[9]동국대학교에서 사학을 연구한 1세대 학자인 황의돈은 자신의 저서 《신편 조선역사》에서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의 류성룡, 이산해 등이 김성일의 편을 들어 군사 시설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았고, 조정 대신들이 전쟁 대비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하며 임진왜란의 책임이 김성일에게도 있다고 기록하였다.[9]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 대해 신복룡은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반박하며,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이자 충신이었지 거짓을 고할 인물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성일이 '문중 사학의 희생자'가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9]
김성일은 히데요시의 조선에 대한 의도가 평화적이라고 믿었고, 1591년 일본에서 돌아온 후 선조에게 일본의 침략에 대한 예방 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반면, 함께 사신으로 갔던 서인 황윤길은 히데요시가 조선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당시 동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방어 준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방위 시설 투자를 주장하는 이들은 집권 동인 세력에 의해 서인의 동조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1591년 말이 되어서야 조선 조정은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좌의정 류성룡은 일부 방어 준비를 허용하고 새로운 군 지휘관들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성일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인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의 방어를 책임지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으나, 군사적 경험은 전무했다. 또한 그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는 것에 반대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빠르게 북진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히데요시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김성일의 이전 보고를 문제 삼았다. 그는 국왕에게 허위 보고를 한 죄(사형에 해당될 수 있는 중죄)로 체포되었으나, 류성룡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이후 김성일은 전장에서 활동하다가 1593년 역병으로 병사했다. 임진왜란은 1598년까지 계속되었다.
3. 2. 현대적 재평가
학봉 김성일에 대한 비판적 기술이 2000년대에 들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현대 한국사학계 일부에서는 김성일을 임진왜란을 유발한 책임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을 처음 제시한 인물 중 하나는 서인 황윤길의 후손인 사학자 황의돈이었다.[9]해방 후 동국대학교에서 사학을 연구한 황의돈은 자신의 저서 《신편 조선역사》 128~129쪽에서 '류성룡, 이산해 등 당시 득세한 동인배가 김성일의 편을 들어 군사 시설을 모두 부수고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마음을 놓아 태평한 꿈에 취하여 드러누웠다.'고 기록하며 임진왜란의 책임이 김성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9]
이를 두고 신복룡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9]고 강조하며,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이자 충신이었지 결코 의롭지 않게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김성일이 특정 가문의 입장을 대변하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다고 덧붙였다.[9]
4. 저서 및 관련 작품
김성일은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활동은 후대의 작품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4. 1. 저서
- 《해사록》
- 《상례고증》
- 《조선연혁풍속고이》
- 《학봉집》(사후에 출간된 문집, 1627년)
4. 2. 관련 작품
5. 가족 관계
- '''증조부''' : 김만근(金萬勤) - 김한계(金漢啓)의 아들
- * '''조부''' : 김예범(金禮範, 1479년 - 1550년)
- * '''조모''' : 영해 신씨(寧海申氏)
- ** '''아버지''' : 김진(金璡, 1500년 - 1580년)
- ** '''어머니''' : 여흥 민씨(驪興閔氏)
'''형''' : 김극일(金克一, 1522년 - 1585년)
'''형''' : 김수일(金守一, 1528년 - 1583년)
* 조카 : 김철(金澈) - 김수일의 아들이었으나, 할아버지 김진의 명령으로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 김극일의 양자로 갔다.
'''형''' : 김명일(金明一, 1534년 - 1570년)
'''본인''' : 김성일(金誠一)
'''동생''' : 김복일(金復一, 1541년 - 1591년)
'''부인''' : 권덕봉(權德鳳, 안동 권씨)
* '''장남''' : 김집(金潗)
* '''차남''' : 김역(金湙)
* '''삼남''' : 김굉(金汯)
- * '''외조부''' : 민세경(閔世卿)
- * '''외종조부''' : 민세정(閔世貞)
- '''진외증조부''' : 신명정(申命昌)
6. 관련 문화재
참조
[1]
웹사이트
金誠一
https://kotobank.jp/[...]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2022-09-23
[2]
서적
朝鮮人物事典
(출판사 정보 없음)
[3]
문서
원종공신에 대한 설명
[4]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5]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6]
웹인용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7]
웹인용
조대곤이 고령에서 왜적을 무찌른 일을 아뢰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8]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9]
서적
한국사 다시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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